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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이 아니라 실험이 해자입니다: 자율실험실과 소재 AI의 진짜 병목

AI for Science자율실험실소재과학딥테크VC 관점

지난 글에서 노벨상 수상자 존 점퍼의 이직을 신호로 AI for Science의 부상을 다뤘습니다. 이번에는 그 흐름의 가장 불편하고 중요한 진실을 봅니다. 과학에서 AI의 병목은 컴퓨팅도 아이디어도 아니라 실험이라는 점입니다.

Radical AI의 창업자 조셉 크라우스(Joseph Krause)가 Latent Space 팟캐스트에서 한 말이 이 글의 출발점입니다. "과학에서 모델은 해자가 아니다. 실험이 해자다(In science, models aren't the moat, experiments are)." 그는 덧붙입니다. "우리는 소재 산업에서 컴퓨팅이 부족한 게 아니다. 실험이 부족하다." 그리고 가장 도발적인 한 문장. "당신의 아이폰에 들어가거나 스타십에 실리는 새 소재를 한 번에 만들어 내는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그 주장을 따라가며 넓고 깊게 들어가 보겠습니다. 왜 소재에는 알파폴드가 없는지, 자율실험실이 무엇인지, 어떤 기술사와 논쟁 위에 서 있는지, 누가 베팅하고 있는지, 그리고 투자자는 무엇을 봐야 하는지입니다. 이 블로그에서 거듭 말한 명제, 곧 모델보다 데이터와 실행 환경이 해자라는 이야기가 소재과학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왜 소재에는 알파폴드가 없는가

알파폴드가 푼 문제의 본질은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이 3차원 구조를 결정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서열이라는 1차원 정보가 구조와 기능을 거의 인코딩하기에, 서열에서 구조를 한 번에 예측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분자도 비슷합니다. SMILES 같은 문자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무기 소재는 다릅니다. 조성 공식 하나가 수십 가지 가능한 구조로 이어지고, 같은 화학식이라도 어떻게 합성하고 가공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물성이 나옵니다.

왜 소재에는 알파폴드가 없는가단백질 (알파폴드)아미노산 서열 (1차원 문자열)한 번에 예측3D 구조·기능서열이 구조를 결정하므로모델 하나로 풀린다무기 소재조성 공식합성 (무엇이 실제로 만들어졌나)미세구조 (상·결정립)공정·제조 (주조·적층)자격 인증 (수년~수십 년)단계마다 진실이 바뀐다. 한 번에 못 푼다.
단백질은 서열에서 구조를 한 번에 예측할 수 있지만, 무기 소재는 조성에서 합성, 미세구조, 공정, 자격 인증까지 긴 사슬을 지나며 단계마다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모델 하나로 쓸 만한 소재를 한 번에 만들어 내기 어렵습니다.

크라우스의 표현으로는 "소재에서 진실은 소재 그 자체"입니다. 만들어 보고, 특성을 재 보고, 실제 응용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합성 가능성의 간극도 큽니다. 이론적으로 가능한 무기 화합물은 100억 종 안팎으로 추정되지만 실제로 만들어진 것은 수십만 종에 그칩니다. 열역학적으로 안정하다고 계산돼도 실제로 합성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한때 상온 초전도체로 떠들썩했던 LK-99가 성분이 알려졌는데도 재현이 안 됐던 일이 그 단면입니다.

그래서 소재 개발은 후보 생성보다 그 뒤가 어렵습니다. AI는 새 조성을 제안하는 데 능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만들고, 검증하고, 산업이 쓸 수 있게 만드는 단계는 실험으로만 풀립니다. 바로 이 지점이 자율실험실이 등장하는 자리입니다.

자율실험실이란 무엇인가

자율실험실(Self-Driving Lab, SDL)은 AI 과학자가 가설을 세우고, 로봇 실험실이 그것을 합성하고 특성화하고 시험한 뒤, 그 데이터를 다시 AI에게 돌려주는 닫힌 루프 시스템입니다. 단순한 실험 자동화가 아니라, 무엇을 실험할지 스스로 정하고 결과로부터 배우는 능동 학습의 루프입니다.

자율실험실: 닫힌 루프로 실험을 돌린다사람의 직관을 주입한 AI 과학자가 지휘① 가설·설계새 조성 제안② 로봇 합성실제로 만든다③ 특성화SEM·XRD 등④ 물성 시험산화·인장·경도실험 데이터 회수 → 능동학습으로 다음 캠페인 설계
자율실험실의 닫힌 루프입니다. AI 과학자가 새 조성을 제안하면 로봇이 합성하고 특성화하고 시험한 뒤, 데이터를 회수해 다음 실험 캠페인에 반영합니다. 핵심은 자동화가 아니라, 실패를 포함한 실험 데이터가 모델로 되돌아오는 순환입니다.

Radical AI의 실제 구성을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가설은 전부 AI 과학자가 생성하고, 합성은 일부 사람 박사의 직관이 남아 있으며, 특성화는 자동화돼 있고, 물성 시험 중 산화와 미세경도는 자동화, 인장은 자동화 중이라고 합니다. AI 스택은 오케스트레이터 에이전트, 문헌 검토 에이전트, CALPHAD 같은 외부 데이터, 실험 이미지를 읽는 비전 언어 모델 Matrix, 그리고 독점 실험 데이터베이스로 이뤄진 멀티 에이전트 구조입니다. 처리량은 현재 하루 8개에서 20개 합금 수준이고, 도구 자동화가 끝나면 하루 100개를 목표로 한다고 말합니다.

회사 발표 기준으로 Radical은 최근 5~6개월에 약 1,200개의 합금을 만들었고, 그중 300개는 문헌에 없던 새 조성, 약 10개는 산업적으로 흥미로운 성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는 과거 DARPA와 GE의 합금 프로그램이 1년에 500개를 목표로 했던 것에 견줘 약 10배 빠른 속도라는 주장입니다. 다만 이 수치들은 독립 검증된 값이 아니라 회사 발표 기준이라는 점은 짚어 둡니다.

짧은 기술사: 조합화학에서 자율 발견까지

이 분야는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짧은 기술사: 조합화학에서 자율 발견으로조합화학고처리량 실험1990s소재게놈이니셔티브(MGI)Materials Project2011모바일 로봇화학자 (리버풀)688회·8일2020A-Lab·GNoMECoscientist자율 합성·LLM2023SDL 스타트업Radical·LilaPeriodic2025~
1990년대 조합화학과 고처리량 실험에서 출발해, 2011년 미국 소재게놈이니셔티브가 계산 데이터베이스의 토대를 놓았고, 2020년 모바일 로봇 화학자, 2023년 A-Lab과 Coscientist를 거쳐, 2025년부터 자율실험실 스타트업 붐으로 이어졌습니다.

뿌리는 1990년대 제약 산업의 조합화학과 고처리량 실험입니다. 2011년 오바마 행정부의 소재게놈이니셔티브는 5억 달러 이상을 들여 소재 발견 속도를 두 배로 높이는 것을 목표로 했고, 그 산물인 Materials Project 데이터베이스가 훗날 A-Lab과 GNoME의 스크리닝 토대가 됐습니다. 2020년 리버풀대의 모바일 로봇 화학자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로봇이 8일 동안 688회 실험을 자율 수행해 광촉매 활성을 6배 높였습니다. 기기를 자동화한 게 아니라 연구자를 자동화한 셈입니다.

2023년이 분기점이었습니다. 카네기멜런의 Coscientist는 GPT-4 기반 멀티 에이전트가 문헌을 읽고 클라우드 실험실과 로봇을 제어해 화학 반응을 자율 수행했고, 딥마인드의 GNoME은 220만 개의 새 결정 구조를 예측했습니다. 그리고 버클리의 A-Lab이 그 예측을 실제로 합성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 분야의 가장 뜨거운 논쟁이 터졌습니다.

가장 뜨거운 논쟁: A-Lab과 검증의 병목

A-Lab은 2023년 Nature에 발표됐습니다. Materials Project와 GNoME 후보를 받아, 33,000건 넘는 문헌 합성법으로 학습한 모델이 전구체와 온도를 추천하고, 로봇이 17일 동안 쉬지 않고 합성과 XRD 특성화를 반복해 목표 58개 중 41개를 자율 합성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자율실험실이 새 무기 소재를 만들 수 있음을 보인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런던대의 로버트 팔그레이브와 프린스턴의 레슬리 슈프가 반박을 내놨습니다. A-Lab이 만들었다는 산물의 약 3분의 2가 사실은 기존 무질서 화합물의 정렬된 버전에 불과하고, AI가 수행한 XRD 분석(리트벨트 세밀화)의 품질이 매우 낮으며, 서로 다른 산물의 회절 패턴이 동일하게 나오는 등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결론은 가혹했습니다. 이 연구에서 새 소재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A-Lab을 이끈 게르브란트 시더(Gerbrand Ceder)는 자율실험실이 무엇을 달성할 수 있는지를 보이려 한 것이지 인간 전문가의 최고 분석을 시연한 게 아니었다고 반박했습니다.

이 논쟁이 핵심을 찌릅니다. 자율 합성 자체는 가능해도, 무엇을 만들었는지 검증하는 일이 여전히 병목이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비판이 GNoME에도 따라붙었습니다. UC 산타바버라의 연구자들은 220만 예측의 상당수가 기존 구조형의 사소한 변형이며 신규성과 유용성의 증거가 약하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소재 AI의 화려한 숫자를 볼 때는, 합성에 성공했는가만이 아니라 그것이 정말 새롭고 쓸모 있는가까지 물어야 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A-Lab을 이끌고 그 비판의 한복판에 섰던 시더가, 지금은 Radical AI의 최고과학책임자(CSO)입니다. 가장 유명하고 가장 논쟁적인 자율실험실을 만든 사람이, 이 베팅의 중심에 서 있는 셈입니다. 검증의 병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그 병목을 사업으로 푸는 자리에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누가 뛰어들었나: 스타트업, 빅테크, VC

자금과 인재는 빠르게 모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할이 또렷하게 갈립니다.

모델은 빅테크, 실험실은 스타트업빅테크: 모델·데이터·컴퓨트 (물리 실험실 직접 운영 X)DeepMind · GNoMEMicrosoft · MatterGenMeta · 범용 MLIPNVIDIA · 컴퓨트공급 ↓ (모델 · 데이터 · 가속)스타트업: 자율 실험실을 직접 소유Radical AILila SciencesPeriodic LabsCuspAIChemify해자 = 모델이 아니라 실험 데이터 플라이휠실패한 실험은 논문에 안 실린다 → 그 음성 데이터를 독점 포집빠른 실험 → 더 많은 데이터 → 더 좋은 모델 → 더 빠른 실험
빅테크는 예측 모델과 데이터, 컴퓨트를 공급하지만 물리 실험실을 직접 운영하지는 않습니다. 자율 합성의 실행 레이어는 전문 스타트업이 가져갑니다. 그리고 그 해자는 모델이 아니라, 실패까지 포함한 독점 실험 데이터의 플라이휠입니다.

빅테크 네 곳은 모두 모델과 데이터, 컴퓨트 층에 있습니다. 딥마인드의 GNoME, 마이크로소프트의 MatterGen과 MatterSim, 메타 FAIR의 범용 원자 모델, 그리고 NVIDIA의 ALCHEMI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물리 실험실을 직접 운영하지 않습니다. 자율 합성의 실행은 스타트업의 몫입니다.

그 스타트업들이 큰 자금을 받았습니다(모두 보도 기준). Radical AI는 2025년 7월 RTX 벤처스가 이끌고 NVIDIA가 참여한 5,500만 달러 시드플러스를 받았고, 미 공군과 극초음속용 합금 계약을 맺었습니다. Lila Sciences는 플래그십이 키워 누적 약 5.5억 달러를 모았고, Periodic Labs는 전 OpenAI의 리암 페더스와 GNoME 공저자인 전 구글 브레인의 에킨 도우스 쿠북이 세워 a16z 주도로 3억 달러 시드를 받았으며 70억 달러 밸류에이션 논의가 보도됐습니다. 흥미롭게도 CuspAI의 1억 달러 시리즈 A에는 삼성벤처스와 현대차그룹이 참여했습니다. 한 가지 더 눈에 띄는 점은 NVIDIA의 벤처 부문이 Radical, Lila, Periodic, CuspAI에 두루 투자하며 이 영역 전체에 베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VC의 논리는 모델 우위가 아닙니다. 첫째, 실패 데이터의 독점입니다. 실패한 실험은 논문에 거의 실리지 않으므로, 자율실험실이 그 음성 데이터를 독점 포집하면 공개 문헌으로 학습한 어떤 모델도 따라올 수 없습니다. 둘째, 데이터 플라이휠입니다. 빠른 실험이 더 많은 데이터를, 더 많은 데이터가 더 좋은 모델을, 그것이 다시 더 빠른 실험을 부릅니다. 셋째, 발견에서 제조까지의 수직 통합입니다. 고객인 소재기업과 방위산업은 실제로 만들 수 있는 결과물을 원하기에, 소프트웨어 단독으로는 가치를 다 주지 못합니다. 다만 리스크도 분명합니다. 대부분의 자율실험실은 아직 단일 루프 최적화 수준이고, 고체 시료를 다루는 자동화는 여전히 병목이며, 공개 데이터 표준이 독점 해자를 희석할 수도 있습니다. 한 클라우드 실험실 회사가 공개 구독 모델을 접고 방향을 튼 사례는 사업모델의 위험을 보여 줍니다.

한국과 투자자의 눈

지정학도 빠질 수 없습니다. 크라우스는 중국이 소재의 양산과 제조 혁신 허브에서 구조적 우위를 가진다고 봤습니다. 실제로 중국은 전고체 배터리 같은 영역에서 발견에서 파일럿, 양산으로 이어지는 사이클을 빠르게 압축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응은 국립연구소의 데이터와 슈퍼컴퓨터, 과학자를 민간과 묶는 민관 협력입니다.

한국은 어디에 있을까요. 정부는 2026년 나노·소재 연구개발 예산을 늘렸고, 반도체와 배터리를 전략 분야로 지정했습니다. KAIST와 KIST에서 AI를 소재 연구의 전 주기에 결합하려는 연구가 진행되고, 삼성SDI는 전고체 배터리와 배터리 인텔리전스로 움직입니다. 무엇보다 앞서 본 CuspAI에 삼성과 현대차가 투자한 것은 한국 대기업이 이 흐름을 전략적으로 보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다만 Radical이나 Periodic 같은 독립 전문 자율실험실 플레이어는 한국에 아직 드뭅니다. 그래서 한국의 현실적 자리는 정면 승부보다, 반도체 소재와 배터리 소재, 항공우주 합금처럼 한국이 강한 응용에 자율실험실과 실험 데이터 자산을 붙이는 쪽에 가깝습니다.

투자자의 점검 질문은 이 글 전체에서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그 회사가 실험 루프를 실제로 닫았는가, 처리량은 얼마인가, 실험 데이터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갖는가, 도구와 로봇 통합 수준은 어떤가, 그리고 발견을 넘어 자격 인증과 제조까지의 경로를 현실적으로 설계했는가입니다. 반대로 모델 성능 한 가지나 합성 건수만 내세우고 검증과 데이터 권리를 흐리는 곳은 경계해야 합니다. 크라우스가 던진 또 하나의 통찰도 기억할 만합니다. 도구 벤더는 사람이 아니라 에이전트와 로봇을 위해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학 기기의 API와 SDK, 실험실 운영체제, 로봇 친화 장비 시장이 별도의 기회로 열립니다.

맺으며

자율실험실 이야기는 결국 이 블로그가 여러 번 도달한 자리로 다시 모입니다. 가치는 모델 자체가 아니라, 모델이 실제 세계에서 검증되는 실행 루프에 쌓인다는 것입니다. 소재과학에서 그 루프는 합성하고 측정하고 시험하는 물리 실험실이고, 그 안에서 쌓이는 실패까지 포함한 데이터가 진짜 해자입니다.

그러나 가장 정직한 분별은 A-Lab 논쟁이 남긴 것입니다. 자율 합성이 가능해진다고 해서 새 과학이 자동으로 검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드는 일과 그것이 진짜 새롭고 쓸모 있음을 증명하는 일은 다릅니다. 그 사이의 거리를 정직하게 좁혀 가는 회사가, 결국 이 거대한 흐름에서 가장 멀리 갈 것입니다. 전체 대화는 Latent Space의 조셉 크라우스 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YS-VC | Founder Intake Desk — Intervest